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문단 편집) == 여담 == * [[임마누엘 칸트]][* 칸트는 피히테가 자신의 철학을 완전히 오인하고 있다고 했으며, 피히테의 학설은 기분나쁜 '자아 작용'의 반복이라고 평하였다]로부터 촉발되어 발전해나간 근대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 명으로 그의 사상의 정수는 '''주관적 관념론'''(주관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이다. 그에 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셸링]]은 객관적 관념론(객관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을 내세웠고,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은 피히테와 셸링[* 셸링 역시 원래는 피히테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이를 극복한다. 또한 헤겔에 대해서는 그는 자신의 사상을 훔친 가짜라면서 비난하는 태도를 보인다]의 [[철학]]을 정리하여 절대적 관념론을 내세워 근대철학의 하나의 완결된 형태의 것을 창출해내었다. *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어서 [[국가주의]], 전체주의 사상가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그의 관념론적 사상으로만 따지면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피히테는 "국가의 목적은 단지 공공의 안전과 권리의 체계를 유지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자유를 강조하는 그의 사상을 그대로 견지하면 차라리 자유방임 국가에 가깝다. 다만 피히테는 자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선 국가가 필요하며 국가가 형성되려면 우선 민족적 강한 단결이 필요하기 때문에, 민족적 단결을 위해선 무엇보다도 '''엄격한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미성숙한 시기의 자아들은 도리어 자유를 억압해서 민족 교육을 강하게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래저래 복잡한 면모를 지녔다고 하겠다.[br] 이는 개인의 자유를 외쳤던 프랑스 혁명[* 피히테는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을 격렬히 옹호했다.]이 나폴레옹에 의한 강력한 국가주의로 귀결되면서, 이에 대한 반성으로 그 국가주의를 비판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맥락을 읽어야 그 사상적 복잡성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가 이해될 것이다. 또한 그의 시대의 독일은 프랑스에게 점령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민족을 결속시켜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고자 했고 세워야만 했던 시기였기도 했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사상을 펼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성숙한 개인에 대한 매우 강력한 법적 통제로 엄격한 교육을 시행하고자 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국가주의와 심지어는 민주주의(다수에 의한 지배)까지 비판하긴 했으나 그의 정치관은 일면적으로 해석하긴 힘든 부분이 많다. 그는 정부를 견제하는 '최고관리위원회'를 두자고 말하기도 했고, 헌법과 정부의 교체에 관한 국민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선 국민투표를 수단으로 사용하자고 말하기도 했다.] --나라가 있어야 개인의 자유도 있는거니까-- [각주] [[분류:독일의 근대 철학자]][[분류:1762년 출생]][[분류:1814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